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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매일경제신문사의 경제월간지인 'Luxmen' 창간호(10월호)에 실린 '예병일의 一日不讀書' 코너의 글입니다. 경제노트에서 한번 소개한 책인데 조금 더 길게 다시 소개했습니다. '럭스멘'의 창간을 축하합니다. 새로운 도전은 항상 아름답습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이 가을, 내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는 시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추석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예병일 드림.)
가을이라는 계절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서게 한다. 그래서 좋다. 바삐 걷던 걸음을 멈추고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며 앞으로 걸어갈 길을 생각한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삶은 직업과 일에 대한 것. 일을 하는 직업인으로서, 삶의 가치는 결국 ‘일의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이 직업이나 일을 뜻하는 단어에 '커리어'(career)와 '잡'(job)이 있다. 비슷한 듯 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지금 직업이나 경력이란 뜻의 영어 낱말 '커리어'는 옛 영어로는 잘 닦아놓은 길이라는 뜻이었다. 반면 지금 일자리나 일거리란 뜻으로 쓰는 '잡'(job)은 때에 따라 이리저리 나르고 가져다놓는 석탄덩이나 장작더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422p)
사전을 찾아본다. 커리어는 '보통 시간이 흐를수록 책임도 커지는 직종의 직업, 직장 생활'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A career is the job or profession that someone does for a long period of their life"라는 설명도 있다. '인생의 오랜 시간 동안'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잡은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고 하는 일, 직장, 일자리'로 기술되어 있다. 영영사전에는 "A job is the work that someone does to earn money"라고 설명되어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커리어’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잡’을 갖고 있는가. 나는 지금 ‘잘 닦아놓은 길’을 행복하고 충만한 모습으로 오랜 시간 동안 걸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정신없이 석탄덩이를 이리저리 나르고 있는가…
현대사회로 오면서 우리의 일은 점점 더 '기능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돈벌이를 위해' 이런 저런 기능을 배워놓았다가 석탄덩이를 옮기듯 필요할 때 그때 그때 기능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사회의 시스템이 그런 모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걸 알지만, 그건 허전하고 아쉬운 일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일을 하고 있다면, 스스로가 자신의 일터의 주인이 아니라면, 그건 너무 서글픈 일이다.
노동사회학자인 리처드 세넷 뉴욕대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 ‘장인’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작업장에서 나무에 익숙한 솜씨로 칼집을 내고 있는 목수,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조교, 공연장에서 리허설에 여념이 없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얼굴에서 장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 자체를 위해 일을 훌륭히 해내는 데 전념하고 있는 이들 목수와 실험실 조교, 지휘자는 모두 장인들이다. 이들이 공들여 하는 일은 생활과 직결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목적이 따로 있는 수단인 것은 아니다.”(44p)
‘몰입’은 이런 장인의 특징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삶도 많지만, 장인은 자신의 일에 몰입하며 살아간다. 그 몰입에서 ‘고도로 숙달된 기능’이 나온다. 마스터 목공이나 마스터 연주자의 기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만 시간가량의 실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은 그래서 장인들만의 세계다.
“기능이 높은 단계에 도달해 일단 일이 원숙해지면, 자신이 하는 일을 느낌으로 알게 되고 일에 대한 생각도 깊어진다. 이렇게 높은 단계에서의 기술은 더 이상 기계적인 활동이 아니다.” (46p)
번득이는 재능을 갖춘 신참 의대생들과 여러 해 동안 경험을 닦은 전문의들을 대상으로 두 집단의 임상치료 기능을 비교한 사례가 책에 나온다. 예상대로 경험 있는 전문의들의 진단이 더 정확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이다.
전문의들은 환자의 특이한 증상이나 특수성을 좀 더 개방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의대생들은 환자 개개인에게 교과서에 나온 일반적인 기준을 형식적으로 적용하는데 그쳤다. ‘재능은 뛰어나지만 경험이 부족한’ 의대생들의 한계이자, 인생의 오랜시간 동안 몰입해 ‘자신의 일에 정통한’ 장인들의 힘을 보여주는 예다.
장인의 모습은 어떨까. “장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계속 원숙해져가는 그의 기능이다. 단순한 모방이 주는 만족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인이 장인다우려면 기능은 계속 진화해야 한다. 실기작업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지만 거기서 만족이 생긴다. 반복하는 일이 몸에 익으면서 기능은 내 것이 된다. 이렇게 더디게 굴러가는 작업시간에서 깊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게 가능해진다.” (468p)
장인은 자신의 일을 통해 두 가지 보상을 얻는다.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어 세속의 현실에서 발 디딜 데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자기 일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이 두 가지가 세넷 교수가 말하는 장인이 얻는 보상이다.
우리가 이 시대에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는 물론, 지금처럼 가끔은 멈춰 서서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잘 할 수 있고 사회에 '가치'를 더해 기여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삶의 오랜 기간 동안’ 종사하며 자신을 발전시키는 모습. 내가 선택한, 동시에 내게 주어진 일에 몰입해 숙달된 경지에서 훌륭히 해내고, 항상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자신에게서 존엄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
이 가을에, 그런 ‘장인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